[미국대학원] 박사 1년차 회고
박사 5년 막막하게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후다닥 지나갔다. 나의 경험담이 앞으로 박사과정 진학을 앞두고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지난 1년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을 써보고자 한다.
길고 긴 터널 입장 = 방황의 시작. 나가는 길이 어디인가?
입학 때부터 지도교수가 정해지는 많은 학교와 달리 우리 학교는 첫 1년동안 지도교수를 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박사과정을 하염없이 길게 하고 싶지 않다면 입학과 동시에 서둘러 지도교수 탐색을 시작하고, 늦어도 1년안에 결정을 내려야한다. 오퍼레터에 써있는 기간은 1년이지만, 학교에서는 되도록 한 학기 이내로 교수와 합의를 보고 두번째 학기부터 연구를 시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지도교수를 선택하는 과정은 교수님들의 프로필을 둘러보고, 컨택하고, 한 학기정도 independent study를 해본 후에 계속해서 이 분과 박사과정을 진행할 것인지, 다른 교수님으로 변경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입학 직전에 어떤 교수님으로부터 본인과 함께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지원할 때 냈던 sop를 교수님들이 검토를 하고 마음에 드는 학생에게 먼저 컨택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내가 바로 거기에 당첨된 것이다. 사실 지원 당시에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았던 교수님이라 이런 제의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렇다고 지도교수를 확정하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나 역시도 똑같이 다른 여러 교수님들과 미팅도 하고 탐색을 했다. 나의 문제는 우리 학교가 주력하는 연구분야 자체가 나와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에서 나왔다. 학교가 주력하는 특정 분야가 너무 커서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그 분야에 속해있고 펀딩과 기타 자원들이 그쪽으로 몰려있었다. 그런데 내 관심사는 전혀 그쪽이 아니었고… 나에게 제안을 주신 교수님은 그 분야에 속해있지 않은 몇 안되는 교수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내 관심사에도 확신이 없던 상태여서(1년차가 뭘 알겠는가ㅋㅋㅋ) 이 분과 함께 공부를 하는 게 맞는지, 연구 주제가 잘 맞는지, 내가 원하는 게 이게 맞는지 등등 고민하는 과정이 꽤 길었다. 첫 학기에 랩미팅에 나가다가 방황을 이유로 다른 교수님에게 컨택하기도 하고 중간에 랩미팅을 안나가기 시작했다. 그 땐 솔직히 랩미팅에 가도 뭘 말해야할지 몰라서 교수님께 내 상태를 잘 설명하고 그만 나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꾸역꾸역 나가는 볼 걸 싶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이 교수님과 계속 함께하기로 결정했으니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다른 교수님들과 미팅을 할 때는 교수님들이 별로 관심이 없어보여서 나도 의욕이 떨어졌었는데, 지금 교수님은 처음 미팅할 때부터 나를 학생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위주로 했던 것 같다.
1년차의 일상
첫 해에는 연구 말고도 해야할 일이 많다. 일단 코스웍을 한 학기에 2과목 정도 들어야한다. 개인적으로 학부 때보다 코스웍의 난이도 자체가 아주 힘들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 준비를 하는 데 과목당 주 10시간 정도는 투자해야한다. 두 과목을 들으니까 어림잡아 20시간쯤이 이미 코스웍에 투자되는 셈이다. 우리학교는 박사생 펀딩에 코스웍 학점 조건도 붙어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일정 학점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미리미리 복습을 해두지 않으면 시험에서 쪽박차는건 물론이고 준비할 시간도 부족할 수 있어서 시험기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코스웍 복습에 약간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들이고 있다.
거기다가 TA가 되면, 학기 중에 주 20시간을 조교로 일한다. 이 20시간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채점이다. 적게는 50여명에서 많게는 200명이 넘는 규모의 수업에 배정되는데 일정 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채점을 끝낼 수 있다. 오피스아워 1시간도 매주 가져야한다. 이 외에도 교수님이 시키는 수업에 관련된 잡일을 해야할 때도 있다. 일만 하면 다행인데, 만약 어쩌다가 잘 모르는 과목에 배정되면 나도 학생들만큼 공부를 해야한다. 과제를 도와주고 질문에 답을 해주기 위해서 렉쳐를 듣고 교과서를 읽느라 추가적인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경우가 최악이다.
처음 미국에 와서 정착하고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만으로도 벅찬데, 이런 정신 없는 생활을 이어가다보면 어느새 1년이 끝나있다.
아무도 나에게 뭘 해야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본디 연구라는 것이 세상에 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므로 솔직히 내가 뭘 해야하는지 파악하는 것도 어렵다. 처음 일단 랩미팅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주마다 내가 뭘하고 있는지 업데이트를 해야했는데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하는지 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뭘 말해야한단 말인가. 그게 나한테는 꽤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부담이었다. 연구를 하려면 온전히 내 아이디어를 가지고 가야했고, 어딘가 막히면 교수님이 조언을 해주는 식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 랩에 계속 속해 있을지 말지도 고민하던 때라 더 힘들었다.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교수를 어떻게 고르지 → 교수를 골라야 뭘 하지 → 모르는데 어떻게 골라 → 그래도 골라야해” 이런 말도 안되는 상태를 반복했던 것 같다.
박사과정은 나의 연구를 스스로 이끌어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내가 주도하고 스스로 빌드업해야 한다. 가끔 교수님이 ‘이거 한 번 읽어봐라, 이 학회에 한 번 참석해봐라, 누구의 세미나를 들어라’ 하는 식의 떡밥을 한 개씩 던져주시긴 하지만, 간헐적인 힌트일 뿐, 그 누구도 내게 어떤 논문을 어디부터 어떻게 읽어야할지, 어떤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디벨롭할지, 그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서 배워야할 이론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해야한다. 교수님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교수님은 내가 적극적으로 진행과정을 어필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연락도 거의 안한다. 1년차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 기회는 많지 않고 내가 뭘 하던 말던 교수님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코스웍으로 바쁘기도 하니까 그쪽에 더 집중하게 내버려두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코스웍을 열심히 해야 연구를 할 지식이 쌓일테니. (내 주변 박사생들을 보면 교수님들 대부분 1년차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터치하지도 않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제때 팔로업하지 않아서 뒤쳐지는 것도 내 몫이다. 연구 경력도 없고, 논문을 써 본 적도 없는 내가 처음 대학원에서 와서 방황했던 건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낯설고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고, 어쩌면 그게 당연했던 것 같기도 하다.
워라밸의 중요성
이런 상황이니 대학원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대학원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관리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이 부분에서는 지난 1년동안 꽤나 선방했다고 생각하는데, 직장생활을 경험해 본 것이 꽤 큰 도움이 됐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극강의 워라밸을 자랑하는 회사였지만, 어쨌거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생활을 3년 가까이 했던건, 나에게 직장인 마인드를 장착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고, 급기야 대학원에 와서도 이 방식을 고수하게 만들었다. 보다 자유로운 시간 활용권이 주어진 지금도, 회사에 다니던 습관대로 대학원은 직장이고 연구는 직업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수업 스케쥴이나 미팅 스케쥴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하며, 정해진 시간에는 무조건 잠을 잔다. 직장인이 하루 8시간 동안 일을 하는 것처럼 코스웍과 연구에 투자하는 최소한의 목표시간이 있다. 일주일의 하루는 무조건 휴식이다. 그 때 일주일간 하지 못한 집안일과 잡무를 처리하거나 바람을 쐬러 나간다.
이런 생활패턴을 갖는 게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공부만 하는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아직 할 일이 적어서 유지되는 것일지라도 적어도 5년간 박사생으로 공부를 해야하니 지금의 생활패턴과 건강이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졸업까지의 내 목표이다.
연구 노트 작성하기
지도교수를 확정짓고 연구를 시작하면서, 교수님이 얼만큼 깊이 관여를 하던간에 내 스스로 뒤쳐지지 않았다고 느낄만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뭘 해야할 지 모르는 상태'로 인해 생기는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서 ‘1일 1논문, 1일 1연구노트 작성, 매주 토요일 휴식’ 루틴을 만들었다. 지금 교수님과 공부하기로 확정 지은 후 바로 시작했다. 연구노트에는 별 의미가 없는 내용이어도 생각나는 건 다 적어두고, 논문 요약도 적어 필요한 것들을 쌓아뒀다. 연구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다 적어두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잊은 내용도 떠올리기 쉽고 교수님께 질문할 내용도 찾기 편하다. 4월이 되고 학기 말이 다가오면서는 마지막 인턴 면접에서 상처를 꽤 크게 받아 멘탈이 무너진 이후로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몇 달간 꾸준히 잘 실천했다. 연구노트는 매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습관화하는게 좋다.
연구노트에 내용이 어느 정도 쌓이면 지금까지 써온 내용들을 글로 정리한다. 어차피 학위의 결과물은 논문으로 나오니, 지금부터 조금씩 쓰고 다듬고를 반복하면 나중에 논문 쓸 때 조금이라도 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했는데, literature review paper를 쓸 때 도움이 많이 된다.
독립연구자로 가는 길
지난 1년간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박사공부는 생각 이상으로 독립적이어야한다는 것이다. 박사과정 자체가 독립연구자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라지만 내가 어디로 나아가야하는지, 이 길이 맞는지조차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해야한다. 지도교수의 역할은 그저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일 뿐. 올 여름이 지나면 나는 2년차 박사생이 되고 qualification exam을 준비하게 된다. 다음학기 나의 목표는, prelim을 위한 연구주제를 확정하고 논문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교수님이 가르치는 코스웍도 듣기로 했으니 이 수업과 연구를 같이 엮어서 끌어가는게 나의 베스트 플랜이다. 2년차가 끝난 후에 나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다. 그땐 아마 워라밸 따위 집어던지고 prelim 준비하느라 머리가 다 빠져 있을 수도?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헛소리라고 콧방귀 뀌지나 않으려나 모르겠다😝